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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석, 컨설팅

이원복, 박시백 그리고 윤태호의 학습만화

나르사스 2018.01.05 12:50

* 여러분들이 많이 찾아주신 덕분에 제 첫 책인 <역사컨설팅(가제)>의 원고작업을 무사히 마쳤습니다. 2018년 초순 출간될 예정입니다. 감사드립니다!



1. 학습만화는 쉽게 전달하기 어려운 인문, 사회, 과학적 지식을 만화의 형식으로 재구축해서 제공하는 상품이다. 관직에 나가는 것이 입신양명(立身揚名)이 국시를 넘어 가시(家是)인 우리나라다 보니 90년대 말까지만 해도 만화를 사회의 악의 축으로 규정하는 분위기였음에도 학습만화만큼은 67년 태어난 이래로 승승장구했다. 


대한민국 학습만화의 틀은 금성출판사의 컬러 만화 학습(1976)년에 잡혔다. 그 당시 만화는 대본소에 납품하기 위해 시험지라도 불리던 싸구려 종이에 인쇄되었는데, 이 학습만화는 하드커버에 책갈피 줄까지 달린 호화판이었다. 이 고급스러움은 학습만화의 수준을 바꾸는 역할이 되기도 했지만 책을 고가품으로 만드는 원흉이 되기도 했다. 


금성출판사는 만화라는 상품의 가치를 바꾸기 위해 공격적인 마케팅을 취했다. 제품의 포지셔닝을 아이들이 아닌 어른들에게 해야 했고, 어른들에게 맞는 제품으로 바꾼 것뿐이다.




금성출판사의 컬러만화학습(1976) 30~40 연령 대에 이 만화 안보고 자란 사람은 없다 [출처:컬러만화학습]




2. 이렇게 학습만화 시장은 커져갔다. 저자는 두 번째의 전기를 80~90년대의 일본 학습만화 번안 열풍으로 보고 있다. 학습만화 시장은 굳건했지만 당시 출판시장은 전문적인 지식을 어린이에게 맞게 바꿔주는 노하우가 부족했다. 


공룡, 곤충, 동물은 그나마 나았지만 우주, 생명공학분야는 전문서를 대상에 맞게 재구성하지 않고 그대로 만화로 그리는 수준이었으며 당시 일본 여행도 가기 어려운 상황에서 세계의 문화를 다룬 만화는 기획 자체가 꿈같은 일이었다. 위에서 말한 금성 학습만화에서 상대성 이론, 물질의 세계, 분자 원자 소립자는 당시 초등학생인 저자를 괴롭히기 충분했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 학습만화에 눈을 돌린 건 일본문화를 마구잡이로 베껴 다 쓰던 한국사회에서 지극히 당연한 발상이었을지도 모른다.



제일 왼쪽 책은 육영사 편집부가 저자로 되어 있다. 이건 100% 일본학습만화 번안품이다 [사진출처 : 알송규의 이야기방]


이런 책들은 기존의 학습만화 시장이 놓치던 틈새시장을 공략하기 충분했다. 우선 만화적 구성이 뛰어나서 아이들이 직접 고를 정도였다. 가격은 1500~3000원 정도로 용돈을 공략할 수 있었다. 다만 나이가 들고 보니 많이 어이없는 책이 되어버려서 만화에서 타코야키, 일본식 주택이 나오고 등장인물들은 긴소매 셔츠와 반바지를 입고 나오기도 했다.



일본은 기후가 따듯해서 긴팔과 반바지로 버틸 수 있다. 당시 학습만화 주인공들이 이런 옷을 입었다면 100% 일본만화의 번안이거나 캐릭터를 베낀 것이다 [출처: 도라에몽]



덕분에 일본에서 꽤 고전으로 속하는 '아사리 요시토'라는 걸물 작가는 드래곤볼의 '도리야마 아키라'보다 먼저 알려지기도 했다.



3. 이런 학습만화가 본격적인 만화시장의 '노다지'가 된 계기는 김영사의 '먼 나라 이웃나라'였다. 지금 판매되는 여러 차례 개정된 판본은 시대감각에 맞지 않는 책이라, 요즘 분들은 잘 모르시겠지만 당시에는 굉장히 파격적인 택이었다.


80년대 말~90년대 초는 옆에 일본만 다녀와도 굉장히 잘 사는 사람 축에 들어갔고, 주재원 출신이라도 있으면 아는 것만으로도 영광이었던 시절이다. 그만큼 글로벌 문화를 접하기 힘들었고 총의(總意 : consensus)를 구하기도 어려운 소재였는데 이 만화는 이를 멋지게 극복했다.


가장 큰 미덕은 '포지셔닝(Positioning)의 장벽을 넘어선 것이다. 보통 학습만화는 포지셔닝이 굉장히 극단적인 분야다. 어린이를 대상으로 잡으면 어른은 유치해서 접하기도 쉽지 않다. 반면 어른을 위주로 잡으면 판매량 감소는 감안해야 한다. 



이런 오류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출판물이 있다. 그 유명한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이다. 학습만화 시장에서 공전의 히트를 일으킨 책을 놓고 무슨 소리냐고 하시겠지만 이 책의 역사를 아신다면 견해가 바뀌실 것이다.




 왜냐하면 이게 원래 표지기 때문이다 [출처: 랜덤하우스]



이 책은 원래 어린이를 위한 학습만화로 기획되었다. 하지만 당시에는 큰 반향을 일으키지도 못했고 랜덤하우스의 계약문제로 인해 5권 이후로는 나오지 못했다. 이후 '휴머니스트'를 통해 다시 출간되게 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출판사는 어린이 취향의 표지를 어른들이 선호할만한 표지로 교체하고, 편집 방식만 바꿔서 출간했다. 


그리고 이 책은 300만 부가 팔리는 대박이 났다.


이 책이 어린이용으로 나왔을 때 안 팔린 이유, 대충 감이 온다. 이 책의 작가인 박시백 화백의 전 직업은 기자다. 그래서 그런지 역사상의 인물들을 묘사하는 화법이 기존 역사학습만화와 다르다. 역사적 사실보다는 인간의 본성과 행동양식에 기반한 추론이 바탕이 된 어른의 현실이 이 만화를 이끄는 핵심이다. 


문제는 아이들이 대상을 이해하는 로직이 그렇게 복잡하지 않다는 것이다. 최근 사회문제 중 하나는 아이들이 임대아파트 브랜드에 거지를 결합해서 부르는 것, 부모의 직장, 자동차 등으로 등급을 나눠 분류하는 것이다. 어른들이 하는 악습을 그대로 배운 셈인데, 문제는 아이들은 이것을 따르는 기준이 어른과 같지 않다는 것이다.


아이들은 어른과 달라서 좋고 싫음의 개념은 있어도 이를 단순히 등급을 나누기 위해 활용한다. 어른과 같은 복잡한 로직이 없다. 좋아하지 않아도 정치를 위해 좋아해야 하는 연기를 해야 하는 이유, 반대로 좋아하면서도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위해 싫어해야 하는 이유는 이해하지 못한다. 제 아무리 똑똑한 아이더라도 마찬가지다. 이는 사회의 여러 가지를 경험하고 분석하면서 생기는 통찰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간의 본성을 알아야 진국이 나는 책을 어린이에게 팔았으니 실패는 당연한 일일 것이다. 어른에게 팔았으니 성공했고.



4. 그만큼 상품에게 포지셔닝(Positioning)은 중요한 과제다. 그리고 이런 면에서 조금 걱정이 되는 작품이 있다. 바로 윤태호 작가의 <오리진>이다. 


오리진은 <미생>으로 국민작가로 떠오른 윤태호 작가의 신작으로 무려 교양학습만화다. 윤태호 작가의 인터뷰, 각종 서평을 보면 이 작품은 어른과 아이가 같이 읽을 수 있는 교양학습만화이며, 주제는 인간이 살아가는 사회적인 가치에 대한 내용이라고 한다. 


교양학습만화는 가장 힘든 분야다. 학습만화 대국이었던 일본 (지금은 한국의 Why?, 마법천자문이 한 수 위다)에서도 정말 드물게 시도된 작품이다. 그래서 <야후> 시절부터 작가 팬이기도 해서 관심을 가지고 봤는데 아니나 다를까 눈에 밟히는 것이 있다.


이 만화의 주인공은 '봉투'라는 미래에서 온 로봇이다. 이 로봇은 인간의 감정 (= 사회적 가치)을 배우기 위해 미래에서 보내진 로봇인데 이 로봇이 2권에서 사고를 치는 부분이 있다. 내용을 언급하지 않는 한에서 간단히 설명하자면, 봉투가 무언가의 사건 때문에 대량의 전기를 충전하려고 집의 콘센트를 썼는데 그 바람에 연립에 사는 모든 전원이 다 내려가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덕분에 그 집들의 피해를 물어주느라 생활비를 걱정하는 내용이 나온다.



저자는 이 상황을 아이들이 이해하기는 어렵다고 생각한다. 아이들이 어른들의 규범에 따라 차별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원래 가지고 있는 계층을 분류하는 본성을 위해 어른들의 기준을 빌려 쓰는 것이지, 그 계층이 어떠한 메커니즘으로 이루어져 있는지 파고들어서 생각할 수는 없다. 


저 '봉투'가 벌인 사고로 인한 피해, 생활비의 위협은 오래전에 지어진 '다세대임에도 전원계통이 하나인 옛날 주택'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이해가 간다. 만약 집이 좀 살아서 층간소음 같은 걱정도 안 하고 산 사람이라면 어른도 이해 못하는 주제다. 그래서 오리진은 윤태호 작가의 최고 장점인 소품의 연결고리를 찾는 통찰력이 역으로 나타난 작품이라고 본다. 아이들에게 보여주는 책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애초에 박사급 인력이 취업할 곳이 없어 살집도 못 구하는 디스토피아에 대한 통찰이 아이들에게 있을까? 가장 복잡한 세계관을 그렸던 대 히트 학습만화인 <미미의 컴퓨터 여행>조차 세계관을 비정상적으로 단순화시켰던 점을 생각해보자. 




사실 미미의 컴퓨터 여행은 세계관은 절대 단순하지 않다. 어린이를 위한 생략의 묘미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출처: 미미와 꿈의 여행]



그럼 어른에게는 어떨까? 그러기에는 이 책의 밀도가 너무 낮다.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먼 나라 이웃나라 그리고 이쪽 계열의 전설인 <윤승윤의 맹꽁이 서당> 같이 어른들에게도 필독서로 꼽힌 학습만화들은 공통적으로 밀도가 높다. 한 권에 담고 있는 내용이 많기 때문에 지루해질 틈이 없다. 


반면 오리진은 4 * 6 배판이라는 상당히 큰 여성지급 판형임에도 그림의 밀도가 낮고, 주제의 밀도가 낮다. 1권은 보온, 2권은 에티켓 등 각 권이 하나의 주제만을 다룬다. 과연 이렇게 낮은 밀도로 성인 독자를 100권까지 잡아나갈 수 있을까?



현재 2권까지 출간되었다. [사진출처 : 오리진]



5. 책 마지막 부분에는 각 테마를 따로 설명하는 부분이 나온다. 이로 미뤄 볼 때 이 책은 분명히 아이들을 대상에 놓고 만들어진 책이다. 하지만 아이들에게는 상황을 이해하는 것 자체가 너무 어렵다. 반면 어른들이 접하기에는 밀도가 너무 느슨하다. 과연 앞으로 오리진은 어떤 결과를 나을까?


물론 저자의 의도와 반대로 대박이 나면, 팬으로서는 좋겠지만 만약 관계자분들이 저자와 같은 생각을 하신다면 조금 더 연구를 해주시면 좋겠다.


그만큼 제품의 포지셔닝은 어렵다.


공감, 추천, 댓글은 무엇보다 큰 힘이 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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